KBS 한국인의 밥상 647회
교양
2024-03-14 (목) 저녁 7시 40분 방송
<그 시절의 봄, 다시 맛봄>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은 모두 봄날이었음을 느낍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다시 찾아온 섬마을의 봄. 내일은 또 어떻게 이 순간을 추억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오늘, 다시 맛보는 그날의 봄을 즐깁니다!
꽃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바다는 이맘때만 맛볼 수 있는 봄철 진미로 봄소식을 전합니다. 물오른 주꾸미가 어부의 어망을 채워주며, 어머니만 홀로 남은 외로운 섬, 추도의 갯벌에서는 바지락, 쫄장게가 새싹처럼 불쑥 인사를 건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겨울이 물러난 태안의 김 양식장에서는 쇠락해 가던 아버지의 바다를 꿈으로 바꾼 아들도 있습니다.
지나간 시절의 봄을 추억하며 오늘을 또다시 웃음꽃으로 채워가는 섬마을 사람들에게 봄 바다는 어떤 빛깔로, 어떤 맛으로 다가올지 기대됩니다.
■ 초전마을에 찾아온 봄 손님, 주꾸미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던 섬, 원산도. 2019년 원산안면대교가 개통된 후, 이곳 원산도는 안면도에서 차로 단 10여 분 거리에 있는 가까운 곳으로 변모했습니다. 원산도의 초입에 위치한 초전마을에는 최근 섬을 들썩이게 하는 봄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이맘때면 알이 차오른 더 맛있는 봄 주꾸미입니다. 주꾸미는 조개껍데기 속에 주로 서식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소라껍데기를 이용해 조업을 합니다. 새벽에 출항한 양상식 씨의 배에도 봄 주꾸미가 가득 잡혀 올라왔고, 이들은 기운차게 꿈틀대는 주꾸미를 가득 들고, 손맛으로 유명한 초전마을 부녀회원들이 기다리는 사랑방으로 향했습니다.
과거에는 원산도의 어부들이 주꾸미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주꾸미를 잡아도 그저 바다에 다시 버리곤 했을 정도였죠. 하지만 이제는 봄 주꾸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섬에도 활기가 넘쳐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철을 맞은 주꾸미로 맛있는 한 상을 준비하기 위해 최순자 씨를 중심으로 한 초전마을 부녀회원들이 열정을 다해 요리를 준비합니다. 주꾸미 본연의 맛을 살린 주꾸미숙회부터 매콤하게 볶은 주꾸미볶음, 알이 꽉 찬 주꾸미로 만든 주꾸미전골까지! 이러한 주꾸미 요리들은 춘곤증마저 이겨낼 만큼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반가운 봄의 전령사, 주꾸미와 함께 즐거운 봄날을 보내고 있는 초전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을에 즐거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 상호: 초전부녀맛집
● 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원산도5길 89-27
■ 김장수, 오늘도 김 따러 갑니다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태안의 갯벌에서 바닷물이 빠지면, 숨어 있던 기둥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기둥마다 김이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장수 씨는 오늘도 손수 김을 채취하기 위해 갯벌로 출근합니다. 태안의 김 양식은 바다 위에서 김을 띄우는 ‘부유식’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지주식’ 방법을 이용합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태안 갯벌을 활용하여,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며 김이 자연스럽게 광합성을 하는 방식으로 양식하고 있습니다. 태안 지역은 예로부터 많은 가정에서 김을 말렸으며, 장수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김을 손으로 뜨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그 기술을 자신의 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7년 전 고향으로 돌아온 장수 씨의 아들은 김 양식에 도전했습니다. 당시 태안의 김 양식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장수 씨의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전통적 김 양식법과 유기농법을 적용하며 새로운 길을 찾았고,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바다에서 새봄을 맞이했습니다. 이 덕분에 암으로 투병 중이던 장수 씨의 아내도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김은 단순히 밥반찬이나 김밥용이 아닙니다. 장수 씨는 직접 따온 김과 텃밭에서 캔 달래로 달래김전을 만들고, 굴과 김을 이용한 굴김말이를 튀겨내는 등 다양한 요리 아이디어를 선보입니다. 어머니 경자 씨는 충청도식 삭힌 김치에 봄 꽃게를 더해 게국지를 끓여내는 등, 가족 모두가 봄 밥상을 풍성하게 차립니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로 진짜 김 장수가 된 장수 씨 가족의 유쾌하고 맛있는 이야기가 마을을 풍요롭게 합니다.
● 상호: 태안김장수
● 문의: 010-5433-2864
■ 추도(抽島)를 지키는 등대, 어머니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빼섬'으로도 불렸던 추도는 송곳이나 못처럼 뾰족하게 솟은 모양의 섬입니다. 영목항에서 배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조현옥 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는 곳입니다. 섬에서 홀로 살고 있는 어머니를 보러 가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죠. 예전에는 열 가구 남짓 살던 작은 섬이었으며, 봄이면 멸치와 실치 잡이, 김 양식으로 활기찼지만, 이제는 어업을 하는 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한산해졌습니다. 그럼에도 현옥 씨에게는 어머니가 계신 추도가 항상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자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도시에서는 장을 보려면 마트로 가야 하지만, 추도에서는 장을 보기 위해 갯벌로 갑니다. 갯벌에는 풍성한 봄의 먹거리가 가득한데, 바위 틈에 숨은 쫄장게(납작게), 봄에 맛있는 바지락, 눈을 가린 듯한 모양의 눈알고둥(눈머럭대) 등 다양한 해산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현옥 씨의 동창 이근수 씨가 선물한 우럭까지 더하면 완벽한 한 상이 완성됩니다. 특히 눈머럭대는 현옥 씨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술을 드신 날, 해장국으로 눈머럭대를 자주 끓여 드셨고, 현옥 씨도 그 쌉싸름한 맛을 좋아해 고향에 오면 자주 먹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안면도에서 추도로 시집온 어머니의 삶은 눈머럭대와 닮았습니다.
현옥 씨가 태어난 봄에는 멸치가 많이 잡혀 어머니는 몸조리도 제대로 못 했고, 현옥 씨는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 모녀는 눈머럭대볶음을 만들며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잔칫날이면 섬마을 사람들 상에 빠지지 않았다는 바지락우무묵무침과 우럭젓국, 추도 사람들의 만능 간장으로 만드는 쫄장게장까지... 이제는 등대처럼 추도를 홀로 지키고 계신 어머니와 현옥 씨가 그 시절의 애환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추도 밥상을 차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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